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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항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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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항케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SS) 지도자이자 고위 관료로, 1903년 독일 라우반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치당에 가입하여 요제프 괴벨스의 개인 비서와 선전부 차관을 거쳐, 하부 실레지아 가우의 가울라이터와 국방 총감독관을 역임했다. 1939년에는 괴벨스의 아내와 불륜 관계를 맺어 선전부 차관직에서 해임되었고, 군 복무 중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45년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친위대 전국 지도자 및 독일 경찰 총수로 임명되었으나, 종전 후 체코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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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항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카를 항케
1945년 2월 브레슬라우의 국민돌격대 선서식에서 연설하는 카를 항케
본명카를 아우구스트 항케
출생1903년 8월 24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실레시아 주, 루반
사망1945년 6월 8일 (41세), 체코슬로바키아, 우스티나트라벰 주, 노이도르프
배우자프레다 폰 피르크스 (1944년)
자녀1명
정치 경력
소속 정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주요 직책
대중계몽선전부 차관1937년 ~ 1940년
니더슐레지엔 대관구지휘자1941년 ~ 1945년
니더슐레지엔 주 주통령1941년 ~ 1945년
SS국가지도자1945년 4월 29일 ~ 1945년 5월
군 복무
복무 기간1920년 ~ 1921년
소속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
계급임시 의용병 (Zeitfreiwilliger)
근무제19보병연대
관직 정보
임기 시작1945년 4월 29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대통령아돌프 히틀러
카를 되니츠
총리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 백작
전임자하인리히 힘러
후임자폐지
임기 시작1941년 1월 27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임명자아돌프 히틀러
전임자신설된 대관구
후임자폐지
임기 시작1941년 2월 1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전임자신설
후임자폐지
임기 시작1937년 11월 26일
임기 종료1941년 1월 27일
임명자아돌프 히틀러
전임자없음
후임자레오폴트 구테르어
임기 시작1945년 4월 29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전임자하인리히 힘러
후임자폐지
학력
모교베루프스페다고기셰스 인스티투트, 베를린

2. 젊은 시절

항케는 1903년 8월 24일 실롱스크 루반에서 기관차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17] 그의 형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했다. 당시 항케는 전쟁에 나가기엔 너무 어렸다. 그러나 1920년대 초반 프랑크푸르트/오더에서 라이히스베어 제19보병연대 임시지원군(Zeitfreiwilliger)으로 복무했다.[17]

디폴디스발데에 있는 독일 제분 학교에서 제분 기술을 배웠고, 1년 동안 철도 작업장 도제로서 실습 경험을 쌓았다.[17]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실롱스크, 바이에른, 티롤 등지에서 제분업계 비즈니스 매니저로 일했다.[17] 그 후 베를린에 있는 직업교육 전문학교에서 직업 학교 교사 자격증을 취득(1928년)했다.[17] 베를린-슈테글리츠에서 제분업 장인으로 일했으며, 이후 베를린 기술 학교 직업 교사가 되었다.[17]

3. 정치 활동

항케는 1928년 11월 1일 나치당에 입당하여 당에서 '암츠발터'라는 낮은 직위로 연설과 공장 관리를 맡았다.[18] 1929년에는 돌격대 예비군에 참가했고, 길거리 담당 부대장이 되었다. 1930년에는 길거리 담당 대장(Strassenzellenleiter)으로 승진했고, 이후 베를린에서 구역 대장(Sektionsführer)이 되었다.[18]

1931년 4월, 정치 활동으로 인해 교직에서 해고된 항케는 당을 위해 풀타임으로 일하게 되었다. 1931년 후반까지 베를린 베스트엔트의 지역대장을 역임했고, 베를린 관구장(Gauleiter)이었던 요제프 괴벨스 밑에서 일했다. 1932년 항케는 지역 조직 감독 대표가 되었고, 같은 해 4월 1일에는 나치당 선전부장(Reichspropagandaleiter der NSDAP)이었던 괴벨스의 개인 비서 겸 조언자(Referent)가 되었다.[19]

3. 1. 알베르트 슈페어와의 관계

카를 항케는 베를린 베스트엔트의 지역대장(Kreisleiter)으로 있을 때 젊은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와 처음 만났다. 항케는 1932년 슈페어에게 서부 교외의 빌라를 지역 당 조직 사무실로 개조하는 계약을 맺었고,[20] 베를린 도심부(Voßstraße 11)에 나치 중앙당 건물을 짓는 일도 소개해줬다.[21]

항케와 슈페어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44년 슈페어의 저서(제3제국의 내부)[22]에 따르면, 항케는 슈페어에게 아우슈비츠를 절대 방문하지 말라고 강력히 충고했다. 항케는 '''"묘사할 수 없고 실제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23]

4. 공직 활동

아돌프 히틀러는 직설적이고 잘생긴 젊은 항케를 좋게 평가했다. 1932년 4월, 항케는 프로이센 주 의회에서 나치 대변인이 되었다. 1932년 말, 항케는 나치당의 포츠담 지역구 후보로 출마해 독일 제국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전쟁 막바지까지 이 자리를 유지했다.[19]

1933년 3월 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이 주도권을 차지한 후, 요제프 괴벨스는 선전부를 정부 기관으로 설립했다. 항케는 괴벨스의 개인 비서로서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1938년 항케는 선전부 국무관(부장관)으로 승진했다.

항케는 히틀러와의 관계와 당 내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1934년 초 일반 친위대(Allgemeine SS)에 가입했다. 1935년부터 1936년까지는 SS제국지도자의 특수 임무 직원으로 임시 업무를 수행했다. 1937년에는 제국문화원(Reichskulturkammer) 부원장이 됐다.[19]

1939년, 항케는 예비군 동원령을 받고 군대에 지원했다. 1939년 7월부터 10월까지 독일 3 기갑사단에서 복무하면서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다. 1940년 5~6월에는 에르빈 롬멜의 독일 7 기갑사단에서 복무하면서 프랑스 침공에 참전했다. 이 전투로 1, 2급 철십자장을 수여받았고, 기사 철십자장 후보로 추천됐지만 기사 훈장은 받지 못했다. 1941년, 독일 육군 중위(Oberleutnant)로 제대했다.

브레슬라우에서 히틀러는 항케를 하부 실롱스크의 대관구장에 임명했다. 1년 후, SS제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항케를 SS중장으로 승진시켰다. 항케는 나치 정책의 광적인 신봉자였다. 브레슬라우에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1,0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사형이 집행되어, "브레슬라우의 교수형 집행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항케는 브레슬라우에서 베를린 대학 강사이자 땅부자의 딸이었던 프레다 폰 피르크스(Freda von Fircks) 남작부인과 오랫동안 사귀었다. 1943년 12월, 그녀는 딸을 낳았는데, 항케의 유일한 자녀였다. 결국 그들은 1944년 11월 25일 결혼했다.[24]

괴벨스 장관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국무장관 발터 푼크(Walther Funk)와 회의를 하고 있다. 배경에는 장관 참모 카를 한케가 전화를 받고 있다.

4. 1. 마그다 괴벨스와의 관계

요제프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의 부부 갈등에 휘말리면서, 항케는 일시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괴벨스는 여배우들과 많이 바람을 피웠는데, 1938년 마그다는 괴벨스와 체코의 젊은 여배우 리다 바로바(Lída Baarová)의 간통 관계를 알고 나서 이혼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항케는 마그다의 편을 들었다.[19] 그는 마그다에게 끌렸고, 마그다도 괴벨스와 헤어지면 그에게 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두 애정 추문은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국 끝났다.[19]

1939년 7월 후반, 마그다는 남편에게 1938년 10월부터 한케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고백했다.[24] 히틀러는 다시 한번 개입하여 괴벨스 부부에게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불륜은 끝났다.[24] 요제프 괴벨스는 즉시 한케에게 휴가를 명령했고, 이후 한케는 선전부로 돌아오지 않았다.[24]

5. 군 복무

아돌프 히틀러의 신임을 받아 1932년 독일 제국 의회 의원에 당선된 항케는 1939년 예비군 동원령에 따라 군에 입대했다.[19] 1934년 일반 친위대(Allgemeine SS)에 가입한 후, 1935년부터 1936년까지 SS제국지도자의 특수 임무 직원으로 임시 업무를 수행했다. 1939년 독일 3 기갑사단 소속으로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고, 1940년에는 에르빈 롬멜 휘하의 독일 7 기갑사단에서 프랑스 침공에 참전하여 1, 2급 철십자장을 받았다.[19] 1941년 육군 중위로 제대한 후,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SS중장으로 승진했고, 1944년에는 SS-''오버그루펜퓌러''로 승진했다.[19]

6. 하부 실레지아 대관구 지도자

1941년 1월 27일 히틀러는 브로츠와프에서 새로 설립된 하부 실레지아 가우의 가우라이터(대관구 지도자) 직책에 항케를 임명했다.[25] 1941년 2월 1일, 그는 프로이센 하부 실레지아 주의 오버프레지덴트(주지사)에 임명되어, 이 주의 최고 당직 및 정부 직책을 그의 통제하에 통합시켰다. 1941년 2월 9일, 항케는 그의 가우뿐만 아니라 상부 실레지아 가우와 주데텐란트 제국가우의 동부 지역을 포함하는 베어크라이스(군관구) VIII의 국방 총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25] 1941년 4월 20일, 힘믈러는 그를 SS 장군 (SS-''그루펜퓌러'') 계급으로 승진시켰다. 한케는 나치 정책의 광신적인 집행자였다. 브레슬라우에서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어 "브레슬라우의 사형 집행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4] 1942년 11월 16일, 국방 총감독관의 관할권이 베어크라이스에서 가우 수준으로 변경되었고, 항케는 그의 가우에 대해서만 총감독관으로 남았다.[25] 1944년 1월 30일, 항케는 SS-''오버그루펜퓌러''로 승진했다.

한케는 베를린 대학교 강사의 딸인 프레다 폰 피르크스 여남작과 브레슬라우에서 오랜 불륜 관계를 가졌다. 그들은 1943년 12월 딸을 낳은 후 1944년 11월 25일에 결혼했다.[25]

7. 브레슬라우 전투

1945년 5월 6일, 독일 장군 헤르만 니호프는 브레슬라우를 포기했다. 항케는 그 전날 미리 준비해둔 소형 비행기(피젤러 슈토르히, Fieseler Fi 156)를 타고 탈출했다.[25] 그러나 독일 군수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는 항케가 당시 흔했던 프로토타입 헬리콥터 중 하나를 타고 탈출했다는 이야기를 디자이너 안톤 플레트너에게 들었다고 주장했다.[25]

제2차 세계 대전 말, 소련 붉은 군대가 실레지아로 진격하여 브레슬라우 요새를 포위하자, 히틀러는 항케를 도시의 "전투 사령관"(Kampfkommandant)으로 임명했다. 항케는 광신적인 열정으로 브레슬라우 공방전 동안 도시 방어를 지휘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1945년 봄, 항케에 대한 찬사를 여러 차례 기록했다. 82일간의 공방전 동안 소련군은 약 3만 명의 민간인과 군인 사상자를 내고 4만 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으며, 그 과정에서 6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5] 공방전 내내 아비아틱 담배 공장은 하루에 500000 개비의 담배를 생산했다. 폭격이 잠잠해지는 동안에는 가끔씩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6]

브레슬라우는 독일에서 마지막으로 항복한 주요 도시였다. 소련의 공중 및 포병 폭격으로 인한 파괴와 SS 및 나치당원들이 저지른 파괴 행위로 브레슬라우의 "80~90%"가 폐허가 되었다.[7]

1945년 2월, 브레슬라우(브로츠와프)에서 한케 가울라이터가 신설된 국민돌격대 대대에 연설하는 모습.


1945년 5월 6일, 브레슬라우 요새 항복 전 협상을 위해 독일 장교단이 이동하는 모습.

8. SS제국지도자 임명

1945년 4월 29일, 아돌프 히틀러하인리히 힘러를 경질하고 항케를 SS제국지도자와 독일 경찰청장으로 임명했다.[10] 히틀러는 힘러가 서구 연합군과 비밀 협상을 시도한 배신자라고 선언하고 그의 모든 직위를 박탈했으며, 체포를 명령했다. 항케는 그보다 8일 전에 소련군에 맞서 브레슬라우 방어를 지휘한 공로로 나치 독일 최고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4월 30일자 히틀러의 유서에서도 항케는 친위대 전국 지도자 겸 독일 경찰 총감으로 지명되었다.[10] 그러나 독일 내부의 혼란으로 명령 전달이 지연되어 항케가 그 명령을 받은 것은 5월 5일이었고, 그때는 이미 히틀러가 자살했고 친위대도 실질적으로 소멸해 있었다.

9. 죽음

1945년 6월 8일, 항케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체코 경비대가 이를 목격하고 총을 쏴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설에 따르면, 항케는 체코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고도 한다.[8]

항케는 1945년 5월 5일 승진 소식을 듣고 프라하로 가서 제18 SS-자원-전차-척탄병 사단 "호르스트 베셀"에 합류했다.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SS 일병 제복을 입었다. 그들은 독일로 돌아가려 했지만, 체코 파르티잔과의 전투 끝에 코모타우 남서쪽 노이도르프에서 5월 6일 항복했다. 체포자들은 항케의 신분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는 하급 SS 대원들과 함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6월, 체코인들이 모든 포로들을 도보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을 때 총 65명의 포로가 있었다. 기차가 행군로를 지나갈 때, 항케와 다른 몇몇 포로들은 기차에 매달려 탈출을 시도했다. 체코인들은 발포하여 항케와 다른 두 명의 포로를 부상입혔고, 이어 소총 개머리판으로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8]

10. 친위대 경력

카를 항케는 1934년 친위대에 입대하여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친위대 주요 계급 및 임명일은 다음과 같다.

계급임명일
SS-안베르터1934년 2월 15일
SS-슈투름반퓌러1934년 7월 1일
SS-오베르슈투름반퓌러1935년 4월 20일
SS-슈탄다르텐퓌러1935년 9월 15일
SS-오베어퓌러1937년 4월 20일
SS-브리가데퓌러1941년 1월 30일
SS-그루펜퓌러1941년 4월 20일
SS-오베르그루펜퓌러1944년 1월 30일
라익스퓌러-SS 및 독일 경찰 총수1945년 4월 29일



항케는 친위대에서 다음과 같은 훈장을 받았다.


  • 구 수비대 명예 휘장
  • SS 명예 반지
  • 라익스퓌러-SS 명예 칼
  • 금색 당 배지
  • SS 장기근속 훈장 2급, 3급, 4급
  • 나치당 장기근속 훈장 동상 및 은상
  • 전쟁 공로 십자훈장 1급 및 2급 (무장 없음)
  • 독일 훈장 (1945년 4월 12일)


1941년, 항케는 니더슐레지엔 대관구 지도자가 되었고, 이듬해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5년 4월 29일, 아돌프 히틀러하인리히 힘러를 대신하여 항케를 친위대 전국 지도자로 임명했다.[10] 그러나 이 명령은 독일 내부 혼란으로 늦게 전달되었고, 항케가 명령을 받은 것은 5월 5일로, 이미 히틀러가 자살한 뒤였다.

11. 관련 도서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교양인 출판
  • Martin Moll, ''Der Sturz alter Kämpfer. Ein neuer Zugang zur Herrschaftsanalyse des NS-Regimes'', in: Historische Mitteilungen der Ranke-Gesellschaft 5. Jg. (1992), S. 1–51.

참조

[1]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2]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3]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4] 웹사이트 Hanke Karl (1903–1945). Gauleiter of Lower Silesia 1941–1945 http://db.yadvashem.[...] The Holocaust Martyrs' and Heroes' Remembrance Authority 2015
[5] 서적 Red Storm on the Reich
[6] 서적 Fallen Eagle - The Last Days of the Reich
[7] 서적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 Deutsche Verlags-Anstalt 2008
[8] 뉴스 Hamburger Allgemeine Zeitung 1949-05-11
[9] 서적 第三帝国の神殿にて
[10] 서적 2022
[11] 서적 大崩壊―ゲッベルス最後の日記 講談社 1984
[12] 서적 2022
[13] 서적 2022
[14] 서적 2001
[15] 서적 2001
[16] 서적 2001
[17] 서적 Rommel's Lieutenants: The Men Who Served the Desert Fox, France, 1940
[18] 서적 Rommel's Lieutenants: The Men Who Served the Desert Fox, France, 1940
[19] 서적 Rommel's Lieutenants: The Men Who Served the Desert Fox, France, 1940
[20]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21]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22] 서적 기억 - 제3제국의 중심에서
[23]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24] 서적 Rommel's Lieutenants: The Men Who Served the Desert Fox, France, 1940
[25]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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